바람이 까슬까슬 잘 마른빨래사이를 어슬렁거립니다.
발이 없어 소리가 없는 걸까. 오늘따라 살금살금 공기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은 바람. 옷이 날리고 초록색 나뭇잎이 간들거리는 것을 보며 바람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산능선 위에 몸을 걸친 채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작별의 인사를 건네는 해님. 순식간에 어둠이 하나씩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일요일부터, 불청객일지 반가운 객일지 아직은 알 수 없는 장마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만나봐야, 외면해야 할지 악수를 나누어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여름이 점점 힘이 세지고 있는 6월의 끝자락, 날씨는 청명한데 마음에는 습기가 쩍쩍 달라붙습니다. 문득 비에 관해 생각하다가 읽게 된 시 <장마>입니다. '최옥'이라는 시인도 '장마'라는 시도 처음 접했습니다. 지금과 참 알맞게도 잘 들어맞는 듯해 문장 사이사이 여백을 쉬어가며 오래 이 시를 읽었습니다.
장마
일 년에 한 번은
실컷 울어버려야 했다
흐르지 못해 곪은 것들을
흘려보내야 했다
부질없이 붙잡고 있던 것들을
놓아버려야 했다
눅눅한 벽에서
혼자 삭아가던 못도
한 번쯤 옮겨 앉고 싶다는
생각에 젖고
꽃들은 조용히
꽃잎을 떨구어야 할 시간
울어서 무엇이 될 수 없듯이
채워서 될 것 또한 없으리
우리는 모두
일 년에 한 번씩은 실컷
울어버려야 한다
-최옥-
예고도 없이 비가 내린 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만났던 예쁜 비유리창도 생각나고, 그냥 비가 와서 무작정 나섰던 산책길에서 만난 빗방울도 생각나고, 흐릿한 안개비 사이로 빛나던 자동차 헤드라이트 불빛도 생각나고, 우산 위로 토닥대던 빗소리도 생각나게 하는 시. '장마'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내심 비에 관한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점령한 모양입니다. 굳이 미리 불러올 필요도 없는 것을 미리 전전반측하며 하얀 밤을 만들다니, 참 어리석은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꼭 나쁜 것만은 아니어서, 말똥말똥한 밤을 생각풍선이 아련한 추억들을 썼다가 지우곤 했습니다.
어쩌면 '실컷 울어버리고 싶어서' 비를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뭉치들이 구름을 살찌우고 찌워서 터져버리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를 노릇입니다. 여름날이면 쉬이 상하는 음식찌꺼기처럼 차마 버리지 못해 꽁꽁 싸매둔 검은 봉지 안의 상한 후회들이 봇물 터지듯 흘러내리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 년에 단 한번 울어야 한다면, 장대비 쏟아지는 장맛비소리를 보호색 삼아 울면 그만입니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비에 섞여 흘러 보낼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울어서 무엇이 될 수는 없겠지만 비워서 가벼워질 수는 있을 겁니다.
올해 <장마>는 어떤 모습일지 알지 못하지만, 부디 별 탈 없이 사이좋게 지내다가 갔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사는 이 세상, 모든 생명체들이 안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여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장마가, 걸음을 재촉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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