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모를 어수선함이 가득한 날, 뒤숭숭한 마음을 뒤적거리듯 책을 뒤적거려 발견한 성미정의 시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를 소개합니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뭐가 됐든 처음과 끝이 있습니다.
사랑 또한 그럴 겁니다. 사랑의 시작은 설렘과 떨림이 충만하지만 시간이 더해질수록 첫 마음과 달리 빛은 옅어지고 선명했던 색깔들도 점점 바래집니다. 사랑이 없어져서가 아니라 익숙해져 가는 시간이라고 생각됩니다. 그 자리에 권태나 지루함이 끼어들기도 할 테죠. 그래서 자주 환기가 필요합니다. 내 사랑을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줘야 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시작입니다'.
지나간 시간 속에서 나는 당신의 무엇부터 사랑했던가를 곰곰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부터 시작되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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