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드득, 은은하고 조용히 내리던 비가 순식간에 폭우로 변했다. 폭우가 멈추면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추락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세상을 나아갈 수 있을까. 찢기고 불타도 다시 내 집에서 내일을 꿈꿀 수 있을까.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오히려 비현실 같은 현실을 그린 영화 <비닐하우스>.
영화 정보
비닐하우스
장르 범죄, 스릴러
개봉 2023.07.26.
국가 대한민국
러닝타임 100분
수상 32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27회 부산국제영화제 왓챠상, CGV상, 오로라미디어상 외
각본 감독 이솔희
출연 김서형(문정 역), 양재성(태강 역), 안소요(순남 역) 외 다수
줄거리
문정은 비닐하우스에서 살면서, 치매노인을 돌보는 간병인 일을 하고 있다. 그녀가 간병인으로 일하는 집은 아들부부와 손자는 외국에 있고 아내는 치매 중증, 남편은 시각을 잃고 초기치매를 앓는 노부부만 사는 집이었다. 주로 노부인의 수발을 돕지만 일련의 집안일을 성심을 다해 보살핀다. 문정에게는 하나의 소망이 있었기에 힘든 간병인 일도, 벌레가 기어 다니는 비닐하우스도 견딜만했다. 그녀의 간절한 희망은 소년원에서 곧 출소할 아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열심히 간병일을 해내면서도 일 년 내내 집을 보러 돌아다니며 아들과의 행복한 미래를 그리며 살고 있다.
문정에게는 자신의 머리와 얼굴을 때리는 습관이 있었다. 없애야 했다. 그래서 상담모임에 나간다. 그 안에서 모임의 일원인 순남과 자의반타의반 가까워진다. 문정은 순남에게 연민을 느끼면서 자신이 사는 비닐하우스를 열어준다. 순남은 자주 비닐하우스를 드나들게 된다.
아들의 출소를 기다리며 하루하루 성심껏 간병인 일을 해나가던 어느 날, 화옥을 목욕시키다가 끔찍한 사고가 발생한다. 화옥의 치매는 의심과 폭력이 지배했다. 갑자기 일어난 사고. 문정은 119에 신고하려던 중에 아들의 전화를 받게 된다. 그 전화 한 통으로 문정은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고 만다. 그녀의 작은 이기심, 욕심(욕심이라고 명명하기에는 그녀의 현실은 너무나 가혹했다)은 스스로도 알지 못한 사이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 사고로 죽은 화옥을 문정은 자신이 사는 비닐하우스 안의 옷장에 숨긴다. 그리고 시각을 잃은 노어르신을 속인다. 문정의 친모 또한 요양원에 상주하는 치매노인이었다. 그녀는 죽은 노부인인 화옥의 자리를 대신해 친모를 데려다 놓는 선택을 해버린다.
한편, 시력을 잃고 초기 치매까지 온 태강은 남몰래 죽음을 준비 중이었다. 자신은 이제 아내를 돌 볼 수도 스스로를 돌볼 수도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순남은 문정에게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며 달라붙기 시작한다. 함께 살고 싶어 한다. 그런 순남의 태도가 어느 순간 문정은 버거워진다. 그래서 순남에게 냉정한 현실을 충고해 주며 사이가 틀어진다.
이제, 순정은 아들과 함께 살 집이 준비되었고 이사도 마쳤다. 마음은 여러 감정이 그녀를 끊임없이 괴롭혔지만 앞만 생각했다. 그렇게, 내일이면 이제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살던, 화옥의 시체가 잠들어 있던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는 문정. 마치 이제까지의 시간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고 새로운 내일이 올 거라는 듯이.
리뷰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다. 라면을 먹을까, 밥을 먹을까 와 같은 아주 사소한 것부터 미래를 가르는 중대한 선택까지. 선택이란 것에 등급을 매긴다면 몇 개의 등급으로 나눌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어떤 등급이 되든 간에 선택은 하나같이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선택이 나를 만든다는 것이다.
영화 <비닐하우스>는 축축하고 눅눅하다. 볕이 나기만을 기다리는 빨래 같다. 무거움을 덜어내고 가뿐하고 산뜻해지고 싶은 빨래. 볕은, 그런 작용을 한다. 또, 비는 내리고 습도 백 퍼센트의 날들이 오겠지만 오늘, 지금 산뜻했으면 좋겠다고 한다. '이것'만 사라지면 비긴 어게인 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삶은 늘 예상하지 못했을 때 더 크게 뒤통수를 갈긴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문정의 유리 같은 뒤통수를 어찌해야 할까.
이 영화가 잘 만들어진 웰메이드 영화라고 느껴지는 것은 아마도 배우들의, 특히 김서형의 연기 덕분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연기는 나를 '문정'이게 했다. 머리를 때리고 가슴을 쥐어뜯는 것, 미세한 표정 하나까지 내가 문정이 되기에 충분했다. 내 뺨이 얼얼해지고 내 가슴이 빨개졌다. 물론 이솔희의 각본과 감독도 빼놓을 수 없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 있다 했다. 그 쥐구멍으로 구멍만 한 볕이 들기를 바라며 누구는 살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행복했던 적은 언제였던가. 숱한 고통을 잘게 잘게 부수며 지금껏 살았던 문정. 바라는 건 단 하나. 내 집에서 내 아들과 함께 사는 것. 그것은 큰 욕심일까. 문정은 그래서, 악인일까. 아니라고, 그럴 수 있다고 어깨를 토닥여야 할까. 지독히도 운이 없는, 삶에 충실한 사람.
우리는 잘나든 못나든 정도는 달라도 모래바람과 모래언덕을 맞고 넘으며 산다. 지나온 삶이 삶이었는지 죽음이었는지 흐릿하지만 내일은 선명해질 것이라고 믿으며 산다. 문정도 그렇게 살아왔을 것이다.
'비닐하우스'는 문정과 닮았다. 쉽게 찢어지고 쉽게 무너진다. 간당간당한 위태로움이다. 또한 유일하게 자신의 육신을 뉘고 바람을 피할 수 있는 자신만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겨우 바느질로 기우고 테이프로 붙인 몸과 마음의 집. 그래도 다 괜찮았다. 왜냐하면, 단단한 콘크리트로 둘러 세워진 안락한 집에서 아들과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희망은, 늪 속에서도 질긴 생명력을 지닌다.
문정에게 앞날이 있을까. 영화가 끝나도 끝나지가 않았다. 현실이 그런 것처럼 영화의 다음은 비극이 틀림이 없어 보인다. 생각도 하기 싫지만 이미 영화의 다음 장면이 현실 속에 계속되고 있는 것만 같다. 이 영화 <비닐하우스>가 준 지독한 현실 공포는 아직도 내 발끝에 매달려있다.
영화는 문정의 과거와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과거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음직 하고 미래는 보는 이가 그려보길 바라는 것 같다. 문정은 왜 비닐하우스에 사는지, 아들은 왜 소년원에 가있는지, 왜 스스로를 때리는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없다.
착착 삶이 퍼즐을 맞추면 완성되는 작품 같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누구나 맞추려고 열심히 노력할 텐데. 답이 있으니까 말이다. 삶은 퍼즐도 아니고 답도 없다. 잘 맞추어간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수렁이 발밑에 있기도 한다. 한 조각의 퍼즐이 결코 완성되지 못하는 그림을 만들기도 한다.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다시 끼워 맞추려면 먼저 그 조각을 찾아내야 한다. 그 한 조각을 찾기 위한 여정이 삶일지도 모른다.
영화에는 작금의 사회문제들이 아프게 등장한다. 늙음과 치매, 죽음, 장애, 고독 등. 총체적 난국 같은 형국이다. 문정의 주변에 득시글대는 차가운 현실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거창하다면 이유나 끈(삶의)을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지독히 냉소적이고 지독히 돌멩이만 가득해도 그래도 살아내야 한다고 외치고 싶은지도.
볕이 좋은 가을 낮인데 마음은 까끌거리고 바람은 서늘한 날, 이상 '비닐하우스'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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